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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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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셉 비토리는 1929년 8월 1일 출생하여 미국 해병대에서 복무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펀치볼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여 명예 훈장을 추서받았다. 1951년 9월 16일, 그는 고립된 기관총 진지를 방어하며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냈고, 이 용맹함과 희생정신을 기려 1952년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는 두 개의 퍼플 하트 훈장과 여러 다른 훈장도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명예훈장'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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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비토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셉 비토리
조셉 비토리
이름조셉 비토리
출생일1929년 8월 1일
사망일1951년 9월 16일
출생지미국매사추세츠주베벌리
사망 장소한국 송내동 근처 (전사)
묻힌 곳처음에는 대한민국 탕곡 유엔군묘지에 안장되었고, 나중에 매사추세츠주 베벌리의 성 마리아 묘지로 이장됨
별명해당사항 없음
군사 경력
소속미국 해병대
복무 기간1946년–1949년, 1950년–1951년
계급병장
소속 부대제1해병사단 제1해병연대 2대대 F중대
참전한국 전쟁 펀치볼 전투 (전사)
훈장명예 훈장, 퍼플 하트 (2회)

2. 초기 생애

조셉 비토리는 1929년 8월 1일 매사추세츠주 비벌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1946년 10월 4일까지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했으며, 이후 해병대에 입대하여 3년 동안 복무했다.[1]

3. 군 복무

입대 후 그는 1946년 12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패리스 아일랜드 해병대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졸업했다. 그는 버지니아 주 노퍽 해군 조선소와 뉴욕 주 브루클린 해군 조선소에서 잠시 복무한 뒤, 1947년 4월부터 6월까지 USS 포츠머스 (CL-102)에 탑승한 해병대 파견대에 배속되었다. 해상 근무 후 1948년 5월까지 필라델피아 해군 조선소에 배치되었고,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주 캠프 르준에서 제2 해병 사단에 합류했다. 1949년 1월부터 5월까지 그는 지중해 지역에서 제6 함대와 함께 복무했으며, 1949년 10월 3일 제대할 때까지 캠프 르준에서 다시 복무했다.[1]

3. 1. 한국 전쟁 참전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명예 훈장을 수상하였다. 해병대 복무를 마친 후 고향인 매사추세츠 주 베벌리로 돌아와 1년 동안 미장공과 벽돌공으로 일하다가, 1950년 9월 26일 해병대 예비군에 입대하여 무기한 현역 복무를 시작했다.[1] 훈련을 위해 노스캐롤라이나 주 캠프 르준으로 돌아갔다가, 1951년 1월 대한민국에 도착하여 제1 해병 연대 제1 해병 사단 (강화)의 제2 대대 F중대에 합류했다. 그는 남부 및 중부 한국 작전에 참여했으며, 1951년 6월 15일에 상병으로 진급했다.[1]

1951년 6월 9일, 그는 강원도 양구군 근처에서 부상을 입어 첫 번째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다. 야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군수병으로 보직되었으나, 일주일 후 이전 보병 소대의 동료들과 다시 합류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1]

1951년 9월 16일, 펀치볼 전투 동안 그의 중대는 조선인민군이 여러 개의 참호 진지를 구축한 749고지를 공격했다. 치열한 조선인민군의 반격으로 전진하던 소대가 큰 피해를 입고 밀려나자, 그는 예비 소대 소속이었음에도 다른 두 명의 지원병과 함께 백병전에 돌입하여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막아 해병대 중대가 진지를 굳건히 할 시간을 벌었다.[1] 나중에, 중대 구역 측면에 있는 고립된 중기관총 진지를 방어할 자동 소총 사수를 구하는 요청이 오자, 그는 다시 자원했다.[1] 막대한 사상자로 인해 그 위치에 약 약 91.44m의 해병대 방어선에 틈이 생기자, 그는 단독으로 조선인민군의 돌파를 막기 위해 싸웠다. 그는 진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뛰어다니며 3시간 동안 1,000발이 넘는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그는 포탄 세례를 받으면서 여러 차례 탄약을 보충하러 갔고, 사수가 쓰러진 후 기관총을 잡았으며, 조선인민군이 그의 진지 몇 피트 앞까지 진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비토리는 얼굴에 총상을 입고 사망할 때까지 조선인민군이 그의 중대 방어선의 틈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다음 날 아침, 해병대는 그 지역에서 조선인민군 병사 200명 가까이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1]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으며, 1952년 9월 7일 그의 부모에게 전달되었다.[1]

3. 2. 펀치볼 전투와 명예 훈장

1951년 9월 16일, 펀치볼 전투 중 조셉 비토리 상병의 중대는 조선인민군이 여러 참호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749고지를 공격했다. 치열한 북한군의 반격으로 인해 전진하던 소대가 큰 피해를 입고 밀려나자, 비토리는 예비 소대에서 온 다른 두 명의 지원병과 함께 후퇴하는 아군을 지나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는 백병전을 벌여 적을 제압함으로써 해병대 중대가 방어 진지를 강화하고 다음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1]

밤이 되자, 중대 구역 측면에 고립된 중기관총 진지를 방어할 자동 소총 사수를 구한다는 요청이 있었고, 비토리는 즉시 자원했다.[1] 격렬한 전투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약 약 91.44m에 달하는 해병대 방어선에 틈이 생기자, 그는 단독으로 북한군의 돌파를 막기 위해 싸웠다. 그는 진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뛰어다니며 3시간 동안 1,000발이 넘는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여러 차례 탄약을 보충하러 다녀왔으며, 기존 사수가 쓰러진 후에는 직접 기관총을 잡고 전투를 이어갔다. 북한군이 그의 진지 불과 몇 피트 앞까지 진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비토리는 얼굴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전사하는 순간까지 적군이 중대 방어선의 빈틈을 넘지 못하도록 막아냈다. 다음 날 아침, 해병대는 그가 방어했던 지역에서 약 200명에 달하는 북한군 병사의 시신을 확인했다.[1]

그의 용맹함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미국 의회는 1952년 9월 7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이름으로 조셉 비토리에게 사후 명예 훈장을 추서했다. 훈장은 그의 부모에게 전달되었다.[1][2] 훈장 수여 이유서에는 비토리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보여준 비범한 용기와 불굴의 정신, 특히 고립된 상황에서도 방어선을 사수하여 중대와 대대 전체의 붕괴를 막은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2]

4. 수상 내역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명예 훈장을 수상하였다. 명예 훈장 외에도 그는 작전 중 부상으로 두 개의 퍼플 하트 훈장을 받았으며, 다음 훈장들을 수여받았다.[1]

명예 훈장금성장이 있는 퍼플 하트 훈장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훈장
해군 점령 근무 훈장 (유럽 고리 포함)국방 근무 훈장한국 참전 기념 훈장 (청동 별 1개)
유엔 한국 봉사 훈장colspan="2" |


5. 기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명예훈장 6화에 소개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Corporal Joseph Vittori, USMCR https://web.archive.[...] History Division, United States Marine Corps 2007-10-12
[2] 웹사이트 Medal of Honor recipients https://web.archive.[...]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1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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